[연재] 맨박스(Man Box)는 내 목젖에 있었어

총괄관리자
발행일 2023.05.29. 조회수 557

얼룩소 정기연재

맨박스(Man Box)는 내 목젖에 있었어

by 정민

🔸9화 <맨박스(Man Box)는 내 목젖에 있었어> by 정민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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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박스(Man Box):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에게 주어지는 억압, 남자다움에 대한 강요로, 전통적인 남성 상에 맞춰 마초적으로 살아갈 것을 주문하거나, 타인(특히 여성, 성소수자)을 통제하거나 지배함으로써 자신의 권력과 위치를 강화하도록 만드는 문화규범으로 나타난다.
 
 
“주말에 한 번 만나면 되는 거 아냐?”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여느날과 다름없이 나는 늦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애인에게 걸려온 전화의 첫 음성, “나 할 말 있어.” 그 말은 신호탄이었다. 이미 지난 인연들이 언젠가 꼭 한 번씩은 했던 말이자, 우리의 관계가 이전과 아주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갈 것임을 알리는 경적소리였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말도 소리도 아닌 대답으로 통화를 이어갔다.  60분의 통화시간, 벌 서는 기분으로 듣고만 있었다. 애인은 수 개월 쌓인 감정의 응어리를 빠른 속도로 쏟아내고 있었다. 언어는 날이 서있었고 목소리에 힘이 실려있었다. 올 것이 온 날, 나는 초조함 속에 짝다리를 짚고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내가 네 우선 순위에 몇위쯤 있어? 한 10위쯤은 되니? 일, 활동, 스터디, 모임, 술자리, 출장, 네 개인시간에 다 내어주고 그 다음 자리쯤은 돼? 내가 보자고 할 때까지 너는 먼저 만나자는 말 한 번을 안 하잖아. 나는 만나자는 말도 ‘네가 바쁠 텐데’, ‘체력적으로 힘들 텐데’ 하며 생각에 생각을 거쳐서 겨우 눈치보다 한 마디 꺼내는 건데, 그렇게 다 고려해서 물어봐도 항상 너는 어디가야 한데, 또 회의가 있데, 이제는 온라인으로도 작업하는 게 생겼데, 나 완전 바보 된 것 같아. 우리 연애 왜 해? 우리 카톡도 전화도 그렇게 자주 안 하잖아. 나도 이거 겨우 이야기하는 거야. 내가 너무 속이 좁은가? 열심히 사는 애한테 괜히 뭐라고만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몇 번이고 주저했어. 알아?”
정적 끝에, 내가 되돌려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미안해,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물론 이 말은 애인을 더 화나게 했고(그걸 왜 나한테 물어?), 통화는 곧 끊어졌다.
 

뭘 더 어쩌라고?”

 목에 걸려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 내가 하고팠던 항변은 아래와 같았다. 

“그러니까,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주5일을 밤낮없이 일하고, 주말에도 스터디에 특강에 이렇게 글까지 쓰고 있는 나에게 뭘 더 기대하는 건데? 어디 한 눈을 판 것도 아니고, 거짓말과 핑계로 둘러댄 적도 없어. 쉴틈 없는 와중에 꼬박 하루 내지 반나절은 너에게 온전히 바치는데, 내가 왜 너에게 그런 미움을 받아야 하는 거야? 혹시 주말 내내 같이 있자는 거니?
그럼 당장은 좋겠지만 나는 미래를 대비할 수 없게 돼. 그것은 곧 더 나은 커리어, 더 나은 대우를 받는 걸 포기하는 거고. 내가 잘 되는 건 곧 네가 잘 되는 것이기도 해. 당장 내가 돈이 있고, 능력이 있어야 너에게 옷 한 벌이라도 사주고, 때우는 식사가 아니라 밥도 제대로 된 걸 먹을 것 아냐? 우리, 언제까지 분식에 메가커피만 먹고 살 거냐고.”
이쯤 되면 여러분도 알지 않는가.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나는 기념일을 놓친 적 없고, 맛집과 좋은 카페를 훤히 꿰고 안내했으며, 항상 친절했고, 장을 보고 음식을 해먹일 줄 아는 애인이었다. 월급도 따박따박 나오는 직장에 다녔고, 데이트 비용도 쓰면 더 썼지 섭섭하게 한 적은 없었고 말이다. 꾸밈노동 또한 잘했다. 츄리닝과 삼선슬리퍼는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어디서 옷 못 입는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없었다. 한 마디로 ‘미루어보고 견주어봐도 손색없는’ 남자친구였다. 그런데 대체 왜, 나는 애인에게 그런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심지어 갑자기 걸려온 60분짜리 폭탄에도 나는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방법을 물었지 않은가.
 

나의 구속일지

통화 이후, 애인과 연락은 잠정 중단되었다. 억울함이 구름처럼 밀려왔지만, ‘그럴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실상 나의 연애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전개되었으니까. 나의 좋아하는 마음과 구애로 관계가 시작되고, 상대는 고민하다가 몇 번의 데이트 후 연애를 승낙한다. 평화로운 몇달이 지나고, 어느 날 갑자기 애인이 서운하다면서 울음을 터뜨리거나 만남 도중 화를 내고, 간밤에 전화가 걸려온다. 그리고 헤어지거나 예전만 못한 사이가 된다. 나도 애인과 다투는 일이 즐거울리 없고,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상대가 나로 인해 서운하고 속상해하니 언제나 미안함과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솔직히, 내가 뭘 잘못한 건지는 알기 어려웠다. 그래서 본디 연애라는 게 구속적인 속성을 지니는 것이거나, “우리 사회에 아직도 서로를 집착하고 못 잃어서 안달인 연애 문화나 연애 시나리오가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씁쓸해 했다.

그게 아니면  마치 응당 받고 누려야 할 것을 내가 주지 않아 괘씸하다는 듯이 말하는 애인이 더 괘씸하게 느껴졌다. 나도 분명히 연애를 위해 잃고 감수하는 것들이 있고, 지켜야 할 선을 넘은 적도 없었다. 내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져야 할 책임을 다 짊어졌다. 그런데 이런 태도로 나오다니. ‘더 내놓으라’며 떼를 쓰는 애인이 대책없어 보이고 못마땅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늘 연애를 시작하게 되면 이런 순간을 으레 예견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때 가서 할 말을 준비해둔 채 말이다. 이전 통화에서 꺼냈던 “미안해, 잘못했어”와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라는 말은 개중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둔 것이었다. 대실패였지만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구자경(손석구 분)이 염미정(김지원 분)에게 했던 말이 처절하게 다가왔다.
 
 
염미정: "할 말 없나?"

구자경: "할 말 있으면 니가 해.
여자들은 꼭 맡겨 놓은 거 있는 것처럼 툭하면 뭘 달래.
내가 너한테 빚졌냐?”

염미정: "누가 다이아몬드 달래?"

구자경: "다이아몬드가 더 쉬워. 추앙이 뭐냐? 난 몰라."

JTBC, <나의 해방일지> 10화 中
 
그렇지 않은가. 원하는 게 있으면 그냥 말하면 되고, 해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하면 되는데 왜 이러는 것인가. 그렇게 같은 실랑이, 동어 반복이 몇 번 더 이어진 후에, 이번 연애는 끝이 났다. 한 계절이 이리 지나간 것이다. 끝을 지은 이후에도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따금씩 열이 나기도 했고, 한숨을 푹푹 쉬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수많은 감정이 일었지만 가장 굵직한 결은 억울함과 속상함이었다. 이렇게 끝날 관계가 아니라고 믿었기에 억울했고, 아무리 섭섭해도 그렇지, 지난 시간 내가 공들여 쏟았던 마음들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아 속상했다. 낮이 밤인 것 같고, 밤이 아침인 것 같았던 며칠을 보내고도, 이 관계를 한층 더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함께한다는 것
그 무렵, 마음을 환기하려 펼친 소설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등장했다. 

“여보 , 우리 주말 껴서 2박 3일 정도 도쿄와 하코네에 갔다 와요.” 



“그래, 그러지 뭐, 당신 마음대로 해.”

남편은 가정사의 결정과 선택을 모두 나에게 일임했다. 
아내에게 전적인 선택권을 주면서 배려하는 것 같지만 
달리 말하면 자신은 관심도 가지지 않겠다는 뜻이자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얘기와도 같았다.

임경선, <나의 남자> 中
 
날카로운 칼에 베인듯 마음이 스산해졌다. 사위가 이토록 어두웠나 싶을 만큼 나는 일순간 고독해졌다. 다친 마음을 달래려고 꺼내든 독백체의 소설이 나를 사뭇 심각하게 만들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애인에게 선택권을 주고, 애인이 하자는 것을 따랐다. 애인이 만나자고 하면 만나고, 애인이 원하지 않으면 곧장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헌신이자 역할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의 언어는 소설 속 남편의 목소리와 무척 닮았다. “어, 그러자.”, “응, 네 마음대로 해.”, “하고 싶은대로 해.”는 내가 참 자주 쓰는 말이었다. 그래서 애인과 뭘 하며 만나면 좋을지 먼저 떠올리기 어려웠고, 애인을 따라나선 곳이 좋아도, 심지어 별로여도 특별한 감흥이 일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고, 애인이 하자는 것을 하기만 하면 되었으니 말이다. 이는 내가 생각하는 애인과의 교제, 관계에 대한 무게와 분리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 날 애인은 내게 이 무게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누군가 연애는 함께하는 것이냐고 물을 때, 그렇지 않다고 답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럼 연애를 혼자 하냐?’는 반응이 돌아올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무엇이 함께하는 것일까? 몸이 같은 곳에 있으면 함께하는 것일까? 같은 식기, 같은 화장실, 같은 침대를 쓰면 함께하는 것일까? 고백하건데 나는 이런 고민을 제대로 자문한 적이 없다. ‘내가’, ‘연애를’, ‘누구랑’, ‘하는지/안하는지’에 골몰했을 뿐, ‘어떻게 함께 만날지’ 떠올려보지 않았다. 나는 연애를 해도 주어가 ‘우리’로 좀체 바뀌지 않았다. 그러므로 연애가 시작되면 ‘나’의 역할과 기능, 능력 그리고 남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만 신경썼다. 내가 느꼈던 억울함은 역할에 충실했음에도 발생한 갈등 때문이고, 애인(아마도 내 삶의 모든 애인들)이 느꼈던 속상함과 화는 내가 연애가 시작된 이후로도 여전히 내 생각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에서 비롯됐음을 몰랐다.
 
 
목젖에서 마주친 맨박스(Man Box)
나는 이미 잘 알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맨박스(Man Box)라는 개념을 떠올렸다. 실상 내가 이 연애에 문제가 없다고 안심한 근거는, 남자다움에 근거한 조건과 역할이 충족되었다고 착각한 것에 있었다. 남자다움의 조건은 더치페이 이상의 데이트 비용을 지불할 능력, 데이트 공간인 집의 소유, 애인에게 부족함 없는 학력, 지식, 문화자본, 사회적 관계의 충족을 의미했다. 남자다움의 역할은 데이트 시 적절한 행동의 수행과 많은 것을 가타부타 요구하지 않는 과묵함이었다. 그러니 나는 남자의 조건과 역할을 모두 달성함으로써 ‘좋은 남자’로 승인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 연애에 문제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맨박스, 남자다움의 억압은 단지 근육을 기르고 돈을 잘 버는 멋진 남자가 되라는 압력 이상의 영향을 미친다. 조건과 역할을 따지는 것에만 빠져, 상대와 좀처럼 상호작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의 경우가 그렇다. 애인이 섭섭함을 토로하면, 왜 섭섭해하는지에 부당함을 느끼고 섭섭할만한 이유를 탐색하는 게 아니라, 애인의 감정을 마주하고 그에 상응하는 나의 감정으로 되돌려주었어야 한다. 애인의 섭섭함 아래에는 나와 더 친밀해지고 싶은 욕구, 나와 더 많은 것을 나누고 싶다는 동기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의 나는 너무나 표면적으로, 피상적으로 애인의 감정을 쳐내기 바빴다. 나는 맨박스에 맞춰 사고하지 않는다고 자부했음에도 그랬다. 맨박스는 가슴 속  감정의 길목에, 그것을 언어로 실어 나르는 목소리를 차단하고 있었다. 상대와 소통하지 말라고, 상대는 지금 너의 역할과 헌신을 무시하고 있는 거라고 말하며. 60분의 통화시간-그날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도록 했다. 아마 애인이 그날의 전화에서  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 바랐던 것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더 사랑해줘.
내가 너에게 하나뿐인 사람이라는 걸 느끼고 싶어.
사랑도 없고 특별함도 없다면 그냥 달콤한 거짓말이라도 해줘.
무미건조했던 나는 말 한 마디를 못했다. 억울함과 부당함에 골몰했을 뿐, 상대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제대로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말을 끝내 듣지 못하는 사람과 계속 사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끝끝내 우리가 걷는 길의 풍경이 달라졌다. 당시 애인에게 걸려온 전화에 나는, 그동안 이 관계의 무게를 오롯이 혼자 감당하게 한 것을 미안하다고 답해야 했다. 그리고 네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바빠서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네가 여전히 나에게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참신한 언어로 돌려주었어야 했다. 이러한 변화 가능성이 담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건너갔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너무 늦어버렸지만 말이다. 당시 애인의 말을 골똘히 번역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번역 할 필요가 없도록, 애인이 그때 나에게 저 말을 그대로 직언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답은 ‘아니다’였다. 당시의 나로서는 어떤 말을 듣더라도 부당한 처사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게다가 저 번역된 말은, 누구라도 쉽게 발음할 수 있는 무게의 언어가 아니다. 나를 더 사랑하고 특별하게 대해달라는 말. 차마 직접 발화할 수는 없어도 너무 간절하게 원하는 말. 나는 기대도 하지 못해 표현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말을 애인은 온 힘으로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에 인용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소통을 시도하는 염미정에게 “추앙이 뭐냐? 난 몰라.”라고 답한 구자경, 이에 대한 염미정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들개한테 팔뚝 물어뜯기길 각오하는 놈이
그 팔로 여자 안는 건 힘들어? 어금니 꽉 깨물고
고통을 견디는 건 있어 보이고, 여자랑 알콩달콩 즐겁게
사는 건 시시한가 보지? 뭐가 더 힘든 건데?
들개한테 물어뜯기고 코 깨지는 거랑 좋아하는 여자
편하게 해주는 거랑 뭐가 더 어려운 건데?”

JTBC, <나의 해방일지> 10화 中
 
사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만나고 사귀려고 연애하는 게 아니라, 그냥 연애가 하고 싶어서, 애인을 인형처럼 곁에만 두려고 만나는 게 아닐까? 진정으로 말을 걸지도, 듣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나는 분명 나의 애인을 사랑했다. 내가 사귀었던 애인들 모두 마찬가지로 당시의 나는 그들을 사랑했다. 그 마음만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사랑으로 대했는지 더는 확신할 수 없게 됐다.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나, 그것이 목젖에 가로막혀 바깥으로 표현될 수 없었다면, 그것을 진정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흔히들 사랑하면 다 잘 만나게 된다는 식으로 쉽게 이야기하지만, 나는 더는 이 통념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맨박스는 단순히 남자다움에 갇혀 근육만 기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맨박스는 사람이 사랑을 매개로 진정 함께할 수 없도록 한다. 삶에서 이보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그래서 성별고정관념으로 점철된 문화에 도전한다는 것은, 왜곡된 사랑을 부디 제자리에 돌려놓으려는 투쟁이다. 표현되어야 사랑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을 막는 억압이 있다. 그러면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이 내 사랑을 알아주지 않는 상대가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가로막는 맨박스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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