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혼자 외롭게 죽고 싶지 않아

총괄관리자
발행일 2023.05.09. 조회수 163
[얼룩소 정기연재 "벌거 벗은 남자들: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8화 <혼자 외롭게 죽고 싶지 않아>가 얼룩소에 업로드 되었습니다.
이번 주제는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많이많이 읽고 널리 공유해주세요.
 
#활동가이한의말
 

<혼자 외롭게 죽고 싶지 않아>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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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고 사망자의 75%가 남성이고 그 중 60대 남성(886명)이 가장 많다.”

스스로에 대한 돌봄, 가족과의 관계 맺음, 감정 표현이 익숙하지 않은 우리네 많은 남성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숫자다. 남성을 대상으로 성평등 교육을 하면서 왜 남성이 성평등과 페미니즘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지 강조하기 위해 저 숫자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섬찟하다. 남성 섹슈얼리티를 탐구하겠다는 이야기를 꺼낸 이후로, 주변에서는 ‘꼭 필요한 주제다’, ‘너무 심각한 문제’라는 이야기를 많이 건넸지만 사실 내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다분히 개인적인 관심과 걱정 때문이다.

나도 혼자 외롭게 죽고 싶지 않다.
연애를 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나름 절절한 연애를 해왔고 심지어 지금도 하고 있다. 결혼할 수 없는 법적인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순전히 운 좋게 아직까지 이성애자로 살고 있기에 의지와 노력이 있다면 우리나라에서 결혼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난 몇 번의 연애와 이별은 점차 내가 우리 사회의 ‘정상가족’과 ‘정상연애’ 이데올로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결혼과 혈연을 통한 가족이라는 기존 관계도 싫지만 동시에 외롭고 싶지도 않은 이 복잡한 마음이 비단 나 하나만의 고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이번 기회에 투정을 조금 부려볼까 한다.

실수와 실패로 점철된 연애 
스무 살, 대학에 갓 입학한 나는 연애를 하고 싶다는 욕망과 연애를 해야 한다는 주변 분위기에 한참 휩쓸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사회는 “대학 가서 하면 돼!”라는 말로 청소년기의 모든 섹슈얼리티에 대한 욕구와 탐구를 유예시키지 않았던가. 그렇게 성숙하지 않은 성인이 된 이들은 늦은 숙제를 하듯 허겁지겁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다하는 게 미덕이라 여겼다. 그러나 늘 그렇듯 인생은 예상처럼 풀리지 않고, 연애에 혈안이 된 스물의 남자애는 못나기 그지없어서 모태솔로라는 딱지를 멍에처럼 지고 몇 년을 보낸 이후에야 연애다운 첫 연애를 하게 됐다. 그것을 ‘첫사랑’ 같은 아련한 단어로 추억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돌이켜 생각해 본 첫 연애는 실수와 문제투성이 그리고 실패로 점철됐다. 안타깝지만 그 이후의 연애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과거의 실수와 부족함으로부터 배워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던데, 유독 연애에서는 이런 교훈이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를테면 나는 사랑과 우정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어떤 이성을 만났을 때, 그 친구가 좋고 함께 있는 게 즐거워서 같이 자리하다 보면 어느새 하하 호호 하다가 손을 잡고 뽀뽀를 하고 한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여기까지 보면, ‘술과 밤이 있는 한 이성 간에 친구는 없다’는 구린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니까, 사실 난 그 친구와 뽀뽀하고 싶지 않았다.
@유튜브 채널 '오분순삭'

그러니까 성격 잘 맞고 함께 있으면 즐거웠으나 그렇다고 꼭 그 관계가 ‘연애’의 형태여야 했을까? 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말처럼, “우리는 살면서 동성이기에 우정으로 넘겼던 사랑이 많고, 이성이기에 사랑으로 착각한 많은 순간을 살아간다”고 하지 않는가. 여성과 너무 친한 남성은 ‘게이’거나 그에 준하는 매력이 없는 남성으로 여겨지기 일쑤였고 나는 그런 오해와 낙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여성과 거리를 두거나 아니면 연애로 숨는 비겁한 방식을 택했다. 그 과정에서 여성과 깊은 우정을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버렸고 연인이 되더라도 그에 따라오는 기대와 책임,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벅차 도망치기 일쑤였다. 좋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다른 관계를 상상할 수 있었다면 내 인간관계는 좀 더 다채롭고 폭넓지 않았을까? 페미니즘을 접하고 비로소 그 문제를 자각했으나 여전히 ‘그래서 어쩌지?’의 영역은 미지수다.
@트위터

“고도로 발달된 우정과 사랑은 서로 구분할 수 없다?” 
앞서의 이야기대로라면, “결국 사랑과 연애는 몸이 끌리는 관계여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또 몇 번의 연애와 고민은 그 명제마저도 부정하게 했다. 어떤 연인과는 뜨겁게 불타올랐으나 그만큼 빠르게 식었고 또 어떤 연인과는 꽤 오랜 시간 성관계 없이도 행복하게 지낸 바 있다. 사회에서는 이를 ‘섹스리스’라 하여 엄청 대단한 문제인 것처럼 여기기도 하지만, 서른 줄에 들어온 지금 주변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고도 문제없이 잘 지내는 커플이 적잖다. 분명 연애에 있어 섹스의 위상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또 연애의 기준이나 전부 역시 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렇게 요모조모 따졌을 때, 내가 내린 결론은, “고도로 발달된 우정과 사랑은 서로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질투와 독점 같은 것을 따져 물어도 마찬가지다. 그저 미디어에서 보고 배운 것으로, 주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들으며 미약하게 연애라는 것의 정의를 내리려 울타리 세워 봤지만 그 때마다 태풍같은 관계가 휩쓸고 지나가 지난 내 생각들을 무용하게 만들었다. 특히 이렇게까지 고민하게 된 데에는 기나긴 연애 이후의 ‘현타’가 한 몫 했다. 

그러니까 써놓고 보면 결국 되게 뻔한 이야기인데, 나에게 딱 맞는 반려자 같은 대상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제법 죽이 잘 맞았고 여느 연인처럼 사랑했다. 그러나 천재지변처럼 권태가 찾아왔고 지지부진한 관계가 지속됐다. 극복하거나 매듭짓거나, 오직 이 두 개의 선택지가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세상에서 그 무엇도 선택하지 않기로 했다. 영 이상했다. 대체로의 친구 관계는 함께하는 시간과 노력에 비례하여 우상향하기 마련인데, 왜 대체로의 연인 관계는 굴곡이 생길까? 그리고 그 하나의 요소가 달라졌다는 이유로 왜 세상에서 제일 친하던 친구와 다신 못 보는 사이가 돼야 할까? 기존의 연애관에서 벗어난 관계를 상상하고 실천해 볼 수는 없을까? 

서로를 아끼고 돌보는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열망 
돌이켜보면 이런 고민은 이별하지 않는 공동체를 꾸리고 싶은 마음의 발현이고 그것은 다분히 나의 결핍에서 출발했지 싶다. 서울에서 태어난 나는 부모의 직장을 따라 신도시와 지방을 오가며 잦은 이사를 다녔고 이렇다 할 고향이나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고향 친구 같은 게 없다. 나름 안정적이고 가정에 충실한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동시에 가족이라는 관계가 얼마나 많은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지 배우기도 했다. 아니 딱히 과거를 파헤치지 않아도 충분하다. 성인이 된 이후, 나의 경제적인 사정은 늘 비정규직과 프리랜서로 대표되는 불안정 그 자체였다. 앞선 관계를 통해서 내 인생에서 사랑 역시 중요하지만 일과 취미 역시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게다가 지구에는 인간이 너무 많다. 그저 나라의 발전을 위해, 개인의 취약해진 노후를 위해 재생산을 한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비윤리적이고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돌봄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나는 언젠가 혼자가 될 테고 사랑하는 사람은 병약해질 것이며 나 또한 병들고 돌봄이 필요해진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기에 언젠가는 나약해질 서로를 돌보고 돌봄 받고 싶다. 다만 언제 또 변할 지 모르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모든 것을 내맡길만큼 용기있지 않고 결혼 과정에서 쓰는 문서와 보증인에 얽혀서 원치 않는 관계를 지속해야 하는 건 끔찍하다. 게다가 세상에는 사랑과 책임감으로 똘똘 뭉쳐도 성별이 같다는 이유로 결혼 하지 못하는 연인도 너무 흔해서 더더욱 결혼이라는 제도로 쉽게 흘러들어가고 싶지 않다. 아직 뒤죽박죽에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지만, 이 모든 고민을 유예하고 그저 때가 되었기 때문에 가족을 꾸리는 일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다는 게 지금 내 생각이다. 

“그러니까, 결국, 그래서,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수식어를 붙이든 결국 뒤에 따라오는 건, 그래서 지금의 연애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연애, 지금의 혈연 가족 형태가 아닌 새로운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방법은 모른다. 나는 아직까지 그런 형태의 공동체를 꾸리거나 비슷하게 경험해 본 적도 없다. 내가 누군가를 돌보거나 편히 돌봄 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까지 ‘정상’이라 이야기 되어왔던 관계에 유통기한이 임박해 왔으며, 더더욱 이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새로운 형태의 관계와 가족을 시도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혼자 외롭게 죽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혈연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메어 살아가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새로운 관계와 공동체를 꾸리고 싶어 이렇게 떠들어대지만 여느 가족들처럼, 혹은 과거 연애처럼 실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늘 그렇듯 우리는 새로운 시도를 찾아 나설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도 이 글이 공감이 간다면 조심스레 제안해 줬으면 좋겠다. 

“우리 동료가 되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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